종교 전쟁 없는 평화의 왕국

‘킹덤 오브 헤븐’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논쟁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비교적 안전한 영화다. 십자군 전쟁의 비극을 극단적 기독교도와 극단적 이슬람교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종교적 교리의 차이는 이 영화에서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대장장이 출신 발리안(올랜도 블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 되는 전쟁과 사랑을 다룬 역사물이다.

1차 전쟁이 시작된 1096년부터 십자군 전쟁은 대략 200년간 지속했다. 영화는 1184년 무렵 볼드윈 4세 왕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시기를 다룬다. 발리안이 살라딘과 전쟁에서 패한 후, 그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인지 물어본다. 살라딘은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지만, 다시 돌아서서 모든 것이라며 웃는다. 역사적으로 복잡한 예루살렘의 이야기만큼 미묘한 웃음이었다.

이 영화는 종교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발리안의 아내는 자살했고, 그도 타락한 성직자를 죽이고 도망친 신세다. 예루살렘이 가면 그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해서 왔지만, 그런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살기 위해 아등거리는 사람들만 있다. 발리안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은 ‘천국의 왕국’이 아니라 전쟁으로 점철된 ‘지옥의 굴’에 가까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아마도 서로 다른 종교적 가치관을 가지더라도 공존할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다. 이들의 평화를 해치는 건 양 종교의 극단주의자들이다. 믿음을 위해서 전쟁을 불사하는 불관용의 인간들이 문제다. 이 극단주의자들만 없다면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게 리들리 스콧의 주장이다. 그건 순진한 발상이다. 종교전쟁은 21세기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루살렘 근처 이라크에서 일어난 전쟁은 극단주의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런 전쟁은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리기엔 엄청난 시각차이가 존재한다.

영화적 완성도에서 킹덤 오브 헤븐은 캐릭터의 형성과정이나 로맨스 전개과정이 너무 급작스럽다. 평범한 대장장이가 예루살렘의 기사가 되고 왕의 신임을 얻게 되는 과정이 너무 허술하다. 왕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는 필연적인 이유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리들리 스콧은 역사극에 너무 많은 흥행의 요소를 집어넣다가 산만해진 모양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역사극이 활극이 되었다.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시대 문헌을 좀 찾아봤다. 얽히고설켜서 몇 차례 왕이 바뀌는 복잡한 권력 관계들의 연속이었다. 영화처럼 낭만적인 이야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제법 있는 걸로 보아, 꽤나 인기있는 소재거리였나보다. 역시 나의 취향은 왕들의 이야기보다 일반인의 자잘한 이야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