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에 빠진 디즈니

디즈니가 ‘마법에 걸린 사랑’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 중심의 평범한 가족영화였다. 하지만 최근 디즈니 자체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 영화를 본 관객의 절반 이상이 25세 이상의 어른이었다. 내가 관람한 극장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부부들도 눈에 띄었다. 나이든 관객들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펼치는 슬랩스틱 코미디에 즐거워했다.

‘마법에 걸린 사랑’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통적 관습을 살짝 비튼 패러디다.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동화의 전통적인 구조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디즈니였다.

디즈니가 만든 ‘백설 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등은 권선징악과 행복한 결말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대표작들이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디즈니가 시도한 변화는 놀라웠다. 판타지와 현실의 철저한 분리를 거부했고 패러디를 허용했다.

최근 들어 ‘슈렉’ 시리즈 같은 애니메이션들이 디즈니 동화에 그려진 세계를 패러디해왔다. 더이상 잘생긴 왕자나 공주는 없었고 못생긴 슈렉이 사고를 치고 다녔다. 동화의 패러디가 유행하였지만, 디즈니는 그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에 걸린 사랑’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동안 이룩한 동화 세계를 조심스럽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약간 위험한 방식을 택했다.

기존 디즈니 규칙을 살짝 비튼 ‘마법에 걸린 사랑’

초반 8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규칙의 핵심이 잘 서술된다. 공주는 언젠가 나타날 왕자님을 기다리며 동물 친구들과 노래를 부른다. 괴물이 나타나 지젤을 괴롭히자 왕자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녀를 구한다. 이어 왕자가 청혼하고 지젤은 거대한 성에서 행복하게 잘살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풍자의 소재에 불과하다. 이후 이야기는 전통 문법을 뒤흔들고 새로 만들기에 집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지젤이 뉴욕 타임스퀘어로 쫓겨오면서 시작된다. 뉴욕사람들의 시점으로 동화에 대한 풍자가 드러난다. 이상한 사극 의상을 입고 복잡한 뉴욕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는 동화의 공주는 정신 나간 여자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아무 곳에서나 노래하는 지젤은 분위기를 난감하게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한술 더 뜬다. 왕실에서 제멋대로 자란 에드워드는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에드워드의 키스 한 번에 숲속의 잠자는 공주도 깨어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을 뽑아 무례함을 꾸짖을 준비가 되어 있다. 동화 속에서는 멋있는 왕자지만 현실에서는 안하무인 사고뭉치다. 그리고 왕비의 충복인 나다니엘은 순정파다. 뉴욕에 온 나다니엘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청승맞게 눈물 흘린다.

이처럼 현실의 거울에 비친 동화 캐릭터는 하나같이 비정상적이다. 동화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생산해온 디즈니가 태도를 바꾼 것일까? 기존에 만든 애니메이션 모두 부정하는 어리석은 일을 디즈니가 할 리가 없다. 디즈니의 전략은 동화적 세계를 살짝 흔들었지만, 완전히 바꾸지 않는다.

동화와 현실의 공존을 선택한 디즈니

‘마법에 걸린 사랑’의 결말을 보면 디즈니가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동화 캐릭터가 현실을 택하기도 하고, 다시 동화로 돌아가기도 한다. 반대로 현실에서 동화로 건너가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디즈니는 동화를 부정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동화와 현실의 공존을 선택한 것이다.

지젤역을 맡은 에이미 애담스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라고 믿기지 않게 천연덕스럽게 동화적 인물을 소화해낸다. 그녀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고 노래 실력도 아주 출중하다. 과연 300명의 다른 여배우들을 따돌리고 케빈 리마 감독의 눈에 들만하다. 그녀는 이 영화 하나만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를 것이 분명하다.

‘마법에 걸린 사랑’은 뉴욕에 떨어진 지젤이 성장하는 이야기로 이뤄진다. 지젤의 뉴욕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젤 주위에는 동화처럼 친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불친절하고 무례한 뉴요커들만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뉴욕에서 어린아이 같은 지젤이 살아남는 법은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지젤을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캐리는 맨해튼 카페에서 친구들을 불러놓고 커피를 마시며 지젤의 어이없음을 수다로 풀었으리라.

동화적 순수함과 비정한 현실의 만남이 이 영화의 주제다. 지젤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하는 인물은 로버트 필립의 딸 모건이다. 엄마를 잃은 충격으로 동화적 세계에만 머무르기를 고집하는 모건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모건은 더이상 보호받기를 원하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지젤을 도와줄 정도로 성장한다.

동화에서 못된 마녀가 괴롭혀도 착하기만 하던 지젤이 처음으로 화를 낸다. 이제 지젤은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애니메이션 인공 캐릭터가 살이 돋고 피가 끓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젤의 성장을 도와주는 로버트 필립은 이혼 전문 변호사다. 동화적 사랑을 믿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또 다른 주연인 로버트의 연기다. ‘그레이스 아나토미’의 미남 의사로 촬영장마다 팬들을 몰고 다녔지만, 발군의 다른 조연들의 연기에 비해 그는 너무 뻣뻣했다. 그의 연기는 지나치게 현실에 매몰된 인물이 나중에 어떻게 동화를 받아들이게 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에 거린 사랑’의 주인공은 지젤이니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공주를 찾아서 뉴욕에 온 에드워드 왕자역은 제임스 마스덴이 맡았다. 영화 ‘엑스맨’에서 눈에서 광선을 뿜는 싸이클롭스였고 최근에 주가를 올리며 ‘헤어스프레이’에서 자신의 쇼를 진행하는 코니 콜린스 역을 맡아서 춤과 노래 솜씨를 이미 뽐낸 바 있다. 제임스 마스덴도 세상 물정 모르고 약간 거만한 왕자의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지젤과 달리 성장하지 않고 동화를 선택한다.

‘마법에 걸린 사랑’은 현실과 동화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한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새로운 동화를 탄생시켰다. 동화와 현실을 융합시킨 새로운 장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기존 동화도 포기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동화 패러디도 받아들인 디즈니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내놓을까. 동화 패러디가 디즈니에 독이 될 것인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맨홀 뚜껑 바깥으로 나온 동화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