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는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의 일간지나 주간지 영화 평론가들이 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했다. 뉴스위크의 데이빗 앤슨, 뉴스데이의 잰 스튜어트와 진 세이무어, 그리고 빌리지 보이스의 네이든 리가 최근에 영화평론직업을 잃었고, 미국의 수많은 신문사가 영화평론 기자를 줄이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대표 영화평론 기자인 에이 오 스콧이 칸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영화 평론가의 위기를 표현했다. 칸 영화제에 출품한 덜 대중적이고 독립 영화적 성격을 띤 영화가 안목 있는 평론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그 미래도 불확실하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영화 평론가의 위기는 주간지나 일간지의 재정적 어려움에서 온다. 종이신문의 구독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고, 광고 역시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영화평론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통적인 분야인 정치면이나 경제면에 주력하는 전략으로 바꾸면서 영화평을 비롯한 문화면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다.

둘째, 인터넷 평론가의 출현으로 그 경쟁이 심각해졌다. 라튼토마토나 메타크리틱 같은 영화평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를 통해 인기를 얻게 된 인터넷 평론가들이 신문사의 영화평론가들에게 도전하면서 상황이 어렵게 된 것이다. 실제로 종이신문에서 인터넷으로 활동영역을 바꾼 영화평론가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셋째, 영화 애호가들이 평론가들의 판단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넷플릭스나 아마존에 올라온 일반인의 영화평이나 블로거의 영화평, 야후의 관객 영화평을 보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평론가들의 취향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이것이 대중적인 영화 취향을 적절히 반영하지 않아서 결국 평론가들이 대중에게 버림받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엘리트주의적 영화평론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과연 영화 평론가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까. 영화 평론가들이 계몽적인 입장에서 관객을 가르치려 하고 대중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론만 되뇌는 지금 같은 평론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대중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의 기호로 말하고 새로운 평론가들이 뜨고 있다.

영화평론가 위기는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체제로 바뀐 영화평론 환경에 새로이 적응할 시기가 된 것이다. 고급 평론도 사라지지 않고 학술이나 고급 취향에 기여할 것이지만 지금보다 그 입지가 매우 좁아질 것이다. 대중적 영화평론가는 인터넷이나 다양한 매체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대중과 영합하는 일이라고 깎아내릴지도 모르나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상 상업적으로 흥행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나도 한때 영화평론가를 꿈꾼 적이 있고 아직도 블로그로 가끔 영화평을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위기를 맞은 영화평론가들은 무척 안쓰럽다. 평생 영화를 보고 성실하게 영화평을 써온 선량한 사람들이 시대의 변화 속에 힘든 처지를 맞게 되었다. 그들이 잘못했다기보다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영화평론이 책으로 팔리는 유일한 사람은 로저 에버트 정도다. 그 사람의 영화평을 읽어보면 비교적 쉽고 대중적인 관점이 담겨있다. 정신분석학이나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대중의 상식이 된다면 모를까, 그 복잡한 평론을 해독하며 신문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알아야 할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스콧이 말한 것처럼 일간지 영화 기자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독립영화의 입지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독립영화는 지금도 인터넷이나 각종 영화제의 도움으로 오히려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 영화 평론가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영화를 이길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마케팅의 힘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 평론가는 영화와 관객을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한다. 신문의 광고를 주는 영화사와 그 신문을 읽는 독자들 사이에서 영화 평론가는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며 성장해왔다. 영화 평론가는 달라진 시대환경에 맞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대중성, 전문성 그리고 새로운 기술까지 고루 갖춘 영화 평론가라면 더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