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전후 세대의 갈등과 사랑

나치의 유대인 학살 영화는 정말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다. 매년 스크린에서 죽어 나간 유태인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너무 오랫동안 우려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단순하게 선과 악의 구도로 학살을 반복해서 재조명하는 영화는 신물이 날 정도로 봤다. 그나마 최근에 본 에드리안 브로디가 주연한 ‘피아니스트’처럼 단순한 선악 구도를 벗어난 나쁜 유태인, 착한 독일군이 섞여 있는 영화가 현실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괜찮았다.

또 유대인 학살 영화인 줄 알았는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보다 복합적인 현실을 다룬 세련된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유대인 학살 장면 하나도 나오지 않고, 전후 독일 세대가 겪었을 윤리적 갈등이 담긴 법정 장면만 잔뜩 나온다. 이 영화는 나치나 유대인의 시각은 철저히 배제하고 ‘전후 독일인’의 시각에 충실히 다룬다. 마이클 버그의 삶 속에 스며든 나치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독일 사회가 겪었을 혼란이 영화 속에서 전면으로 주목받는다. 이 영화는 전후 독일인의 시각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유대인 문제를 다룬 전후 독일 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나 거대하고 함부로 꺼낼 수도 없었던 부끄러운 독일의 과거가 재판으로 낱낱이 펼쳐진다.

15살의 마이클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이상 많은 한나 슈미트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마이클의 첫 경험은 한나에겐 과거를 잊으려는 허무적 쾌락이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건 섹스만이 아니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수많은 소설을 읽어준다.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환상에 빠진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빨리 끝나버린 한나와 마이클의 관계는 몇 년이 흐른 후 재판정에서 다시 재연된다. 한나는 나치 범죄의 가해자였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법대생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마이클은 한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이클이 한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전후 독일 세대가 부모 세대에게 느꼈던 관계를 연상시킨다. 전후 세대가 비록 스스로 저지른 죄는 아니지만, 부모 세대가 행했던 악행 때문에 영향을 받고 괴로워한다. 그 과정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리고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않는다. 재판 같은 사회적 행위를 통해서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정리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비록 관련자가 모두 죽는다고 해도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현재형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상처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복잡하다. 한나의 문맹이 그녀의 죄를 정당화시키지 못하고, 마이클의 한나에 대한 사랑이 한나의 죄를 사라지게 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유대인이 나치를 용서하는 일은 더욱 일어나기 어렵다. 이런 역사적 부담 속에서 성장한 전후 독일 세대는 어떤 심정일까. 이 영화가 출발하는 곳은 전후 독일 세대가 겪은 윤리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다.

한나와 마이클의 육체적 관계는 본능적 행위다. 사랑하는 남녀가 그 과거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빠져드는 그런 관계다. 한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라면, 마이클의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이 딸에게 말을 건네는 건 미래와 대화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는 성장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이클이 너무 답답해 보였다. 사회도 비슷하게 과거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은 마이클과 한나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멀고 느리다. 한국 사회에서도 친일파, 군사정권 등이 저지른 용서 못할 죄가 있다. 사회마다 집단의 죄를 용서하는 방식이 다르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감옥에 있는 한나를 위해서 책을 읽는 걸 테이프로 녹음하는 부분이다. 마이클과 한나는 테이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죄인과 사회가 소통하는 방식도 재판을 통해서 이뤄진다.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은 이렇게 간접적이고 복잡하다. 현실은 영화로 재구성되어서 관객과 만난다. 마이클이 녹음한 테이프는 영화적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 녹음된 테이프가 한나의 감방에서 재생되는 순간 문학이 다시 살아나듯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더 리더’는 나치의 범죄로 고통받는 후손의 현실을 보여준다. 역사는 흘러가지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