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으로 넘어가는 길목

요즘에는 음반이나 책을 거의 사지 않는 편이다. DVD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영화나 책을 즐기지 않게 된 건 아니다. 말하자면 소비하는 방식이 약간 달라졌다.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면서 생긴 습관인지 모르겠으나, 물건이 너무 많아지면 가지고 다니기가 너무 어렵다. 이사 상자에 책을 챙기다 보면 다시는 읽지 않는 책을 처분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든다. 아직 미련이 많이 남아서인지 선뜻 포기하기 쉽지 않다. 그런 고민에 빠지면 내가 왜 이걸 바득바득 모아서 무얼할까하는 생각까지 미친다. 내가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만들 것도 아닌데 이걸 모을 필요가 있을까. 수집벽에 빠진 나에 대한 재발견의 순간이다.

반성의 시간에 잠기자 소비가 잠시 잦아졌다. 그러다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공간을 거의 차지 않는 디지털 미디어로 바뀌었다. 어떤 것은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것이 편했다. 요즘 내 영화 소비의 대부분은 넷플릭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뤄진다. 보고 싶은 어지간한 영화는 여기에 다 있으니까 시간이 날 때 그냥 애플 TV나 노트북으로 보면 그만이다. 스트리밍에 없는 영화는 DVD로 빌려볼 수 있다. 내 직업이 영화 평론가라도 되면 모를까, 이만하면 영화에 대한 욕구는 대충 마무리된다.

쌓아두는 습관은 영화보다 책에서 더 문제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해서 집안 가득 쌓아둔 책이 산더미다. 유학을 나오면서 대충 정리한 책이 다시 영어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종이책에 집착이 강해서 전자책으로 갈아타기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제는 전자책으로 많은 글을 읽고 있다. 전자책 기기로 아마존 킨들 파이어, 아이폰, 아이패드를 사서 잘 쓰고 있다.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더 편하다. 속도도 종이책보다 빨라졌다. 주로 영어책이라서 예전에는 사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터치로 사전찾기가 더 쉬워졌다. 불편한 게 있다면 책을 인용할 때 몇 페이지인지 알 수 없어 다시 종이책으로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전자책으로 모든 글이 발간되는 게 아니라서 구하기 어려운 글이 있지만 그건 전자책이 주류가 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책도 대여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아마도 진지하게 써볼 의향이 있다. 소장하기에 집은 좁고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보지 않을 책을 장식용으로 꽂아두는 데도 유효기간이 있다. 내가 어떤 책을 가졌는지 과시할 욕구가 없다면 별 쓸모가 없다. 필요할 때마다 잠시 빌려 읽는 게 환경문제를 생각하면 더 나은 대안이다. 아마존도 프라임 멤버를 대상으로 빌려주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도서관도 그런 서비스를 실험적으로 써보고 있다. 아직 그런 서비스를 하는 책이 많지 않아서 큰 의미는 없지만, 차차 상황이 좋아질 것 같다. 그런 날이 오면 책 대여 서비스의 충실한 소비자가 되지 않을까.

책을 소장하는 것보다 읽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가벼운 독서가 찾아왔다. 내 아이폰에 책 몇 권을 넣어 다니면서 누구를 기다리며 아무렇게 전화기를 꺼내 한 문단을 읽는다. 그러다 약속했던 사람이 오면 책갈피로 표시하고 다시 집어넣는다. 은행이나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읽는 일도 흔해졌다. 시끄러운 장소에서 집중해서 읽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경험이다. 이런 가벼운 독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자투리 시간을 잘 모으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예전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의 책을 읽게 되었다.

전자책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공간을 덜 차지하고 가벼워서 쓰기가 편해졌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똑같은 작가의 글을 전자책으로 읽는다고 해서 내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더 많이 읽고 편하게 볼 수 있다면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 기술의 변화가 가져온 나의 일상의 변화를 당분간 즐길 것이다. 이 바람이 또 어디로 불어갈지 알 수 없지만, 그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보자.